중세 농민의 생활 1부(Peasant life in the Middle 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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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세 농민의 생활(Peasant life in the Middle Ages)
출처 구글 이미지

지금까지 계속 귀족에 관련하여 판타지 및 유럽 정보글을 작성해왔습니다. 생각해보니 우리들과 비슷한 농민에(농노) 대해서는 조사하거나 알아보지 않았네요.

보통 중세시대의 농민이라고 말한다면 일반인들은 그거 ‘중세 노예 아니야?’ 이란 생각을 많이 가지고 있습니다. 조선시대의 노비를 생각해서 연상된 것인데요. 사실은 계약으로 묶인 자유민이였습니다.

정확하게는 유럽 거의 모든 곳이 계약으로 묶인 하나의 거대한 기업같은 문화라고 봐도 무방했습니다. 이것에 대해서는 다음에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그렇다면 중세 유럽의 인구 약 8~9할을 차지했던 농민에 대해서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먼저 들어가기 전 간단하게 중세시대 장원에 대해 알아보겠습니다.

 

장원제도

장원이란 사람이 땅을 소유하는 형태입니다. 경제 단위를 일컫는 개념으로 쓰이기도 하지만 농민과 영주의 거주지와 경작지인 밭은 물론 경작하지 않는 들이나 삼림 등의 임야도 포함한 사유지를 뜻합니다.

보통 독립된 정치체계로서 소국가와 같은 모습을 가지고 있습니다. 봉건체제의 근간을 이루며 봉건영주를 비롯한 귀족들과의 관계를 공간적으로 형상화되어 있으며 주로 방어를 목적으로 산악과 도서 지방에 위치하고 있습니다.

사실상 마을과 정원은 장원제에 묶여있는 한몸과 같았습니다. 영주는 보호를 명목으로 각종 세금과 부역을 마을로부터 받았습니다. 여기서 영주는 주종관계인 기사가 대신 장원을 받아 경영하는 경우도 있었습니다.

여담으로 교회는 주변 마을 분위기나 주민의 건의 등을 대신 전해주는 영주에게 신문고 역할을하며 견제하는 역할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 외에도 각종 복지 및 교육 등 여러가지 사회보호망같은 역할도 많이 했습니다.

중세의 대략적인 구성
중세의 지역의 대략적인 구성

 

1.마을의 환경

옛날 중세 사람들은 약 13세기경까지 순례나 방랑, 상인 등의 외에는 마을 밖 장거리 이동이 적었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마을의 주변은 거의 숲에 둘러 쌓여있고 거기서 대부분 일생을 보냈다고 합니다. 영주의 명령으로 부역노동도 대부분 하루면 돌아올 수 있는 거리에서 이루어졌다고 합니다. 또한 개발이 많이 안되어서 마을과 도시 사이에는 미개척지가 많았습니다.

농사를 짓기 좋은 토지의 경우는 개간과 간척을 통해 일찍 경작지로 활용하거나 또는 다양한 원료를 공급해주는 장소였습니다.

그 중에서 가장 중요한 곳은 삼림이였습니다. 오죽하면 영주들이 독점하기 위해 노력할 정도였습니다. 대표적으로 국왕, 영주의 수렵용 숲과 촌락의 공동체의 공유림으로 나누어졌습니다.

일반적으로 농민에게는 수렵이 금지되었고 (게르만족이 사냥에 대해 신성시 여겨서 생긴 영향도 있습니다.)  특히 영주와 왕의 소유의 숲은 출입이 금지되어 있었습니다. 그렇기에 당시 농민들은 많은 불만이 많았다고 추정됩니다. 그러한 근거로 로빈 후드 이야기로 근거를 사용되기도 합니다.

하지만 농민은 살아가기 위해서 땔감과 가축 방목, 약초 등으로 숲이 꼭 필요했습니다. 그래서 마을 주변에 있는 숲을 꼭 필요했고, 영주들은 항상 숲의 자원을 수입원으로 삼으려고 했기에 서로 지속적으로 협상했습니다.

영주는 자신이 지배하는 마을 공유림의 수목을 벌채하는 경우 대금의 ⅓를 징수하는 등 소비세같은 개념으로 간접 지배를 활용하고, 그 외 영주 소유의 숲에 대해 위반하면 형벌과 벌금으로 강경 대응했습니다.

중세 말기부터 16세기에 걸쳐 마을 공유림에 대해 침해가 심해집니다. 당시 목재의 수요가 높아져 관습도 무시하며 일반적인 착취가 심해졌습니다. 그렇게 차차 중앙집권화를 원하는 군주에 의해서 모든 숲이 몰수됩니다. 이러한 문제로 생긴 전쟁이 16세기 독일 농민 전쟁의 배경이 되었습니다.

 

대략 마을의 주변에 대한 설명은 이 정도로하고 마을 구성에 대해 말씀드리겠습니다. 보통 마을을 관통하는 도로와 교회(깡촌 X), 중앙에 광장이 있고 그 중심으로 집들이 있었습니다. 또한 하천에는 보가 설치되어 있고 영주 소유의 제분용 물레방앗간이 세워져 있었습니다.

위에서 말한 것처럼 거의 농민들이 밖으로 나가는 경우는 없다고 말씀드렸지만, 영주와 교섭이나 각종 물건들 및 농산물/축산품을 팔기 위해서 나갔으며 종종 마을에 상인이나 순례가 방문할 때 외부의 소식을 듣기도 했습니다.

농민은 무슨 일을 했을까?

위에 글을 보시고 그럼 착취 당하면서 살아갔지? 하는 생각이 드실겁니다. 지금부터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우리들이 서브컬처로 자주 본 12~14세기를 기준으로 이야기 하겠습니다. 왜냐하면 11세기쯤 바퀴랑 농업 장비의 발달로 농업혁명이 일어났기 때문입니다.

 

농업

농업의 중심은 가을에 파종하여 내년 초여름에 수확하는 밀과 호밀 등 가을 곡물의 재배였습니다. 거기에 봄에 씨를 뿌려 가을에 수확하는 곡물로 보리, 귀리, 보통계(빵에 쓰는 밀) 밀도 동시에 재배했습니다.

전자는 제분하여 빵을 만들어서 주식으로 사용했습니다. 왜냐하면 호밀은 척박한 토지나 한랭지에도 재배할 수 있고 수확 효율도 좋았습니다. 하지만 판매용으로는 밀이 좋았습니다. 그래서 밀을 더 선호하여 재배했습니다. 왜냐하면 부자들이 선호 때문이였습니다.

봄에 파종하여 가을에 수확하는건 오트밀처럼 죽으로 만들어 먹거나 맥주로 만드는데 사용되었고, 좀 질이 안좋은건 가축의 사료로 넘어갔습니다.

 

이렇게 봄과 가을 재배와 지력 회복을 위해서 휴경을 동시에 가능한 윤작 방법이 3년 윤작입니다. 영주에 의해서 강제적으로 실행된 것이 아닌 마을에서 자체적으로 행해진 삼포제였습니다. 몰론 본격적으로 보급된 것은 중세 후기의 일이였습니다.(그 전까지는 프랑스의 일부 지역에서 실행했습니다.)

더불어 봄 곡물 밭에는 이랑과 이랑 사이에 완두콩과 까치콩, 누에콩 등을 심었습니다. 육식이 쉽지 않은 농민들의 식생활에 중요한 부분이였습니다. (밭을 갈아서 생긴 파도모양의 굴곡에서 높아진 부분을 이랑입니다. 이 부분에 씨를 심습니다, 낮은곳은 고랑)

이런식으로 복수의 작물을 동시에 재배함으로써 어느 한 작물이 흉년이 들어도 살아갈 수 있는 리스크를 분산하는 효과도 있었습니다.

그러기에 밭을 가는 것은 가장 중요한 부분이기에, 가축을 이용하여 바퀴 달린 중량 쟁기를 이용하여 갈았습니다. 조선시대랑 다르게 말을 선호했습니다. 이유는 더 빠르고 의외로 지구력도 있어서 더 오래 갈았습니다. 토지와 계절에 따라 말과 소를 나눠 사용했습니다.

그래서 8월과 9월에 각각 1회 쟁기질을 하여 휴한기 중에 자란 잡초를 갈아서 뒤집어 퇴비로 활용했습니다. 그러다가 12세기 중반부터 1~2회 더 늘려 지력의 회복을 꾀했습니다. 클뤼니 수도원령에서는 3회 쟁기질한 밭과 2회 쟁기질한 밭의 수확량이 2~3배 차이났다는 기록이 남아있어습니다.

그 외 나무쟁기에서 철제 쟁기로 넘어가는 사이 길드의 독점 등 관련 내용은 있지만 넘어가도록 하겠습니다.

 

이러한 살아가기 위해 곡식을 재배 및 가공하는 것과 달리 작물 중 의외로 와인용 포도가 중요했습니다. 지금보다 따듯했던 중세 유럽에서 널리 포도가 재배되었습니다. 와인의 상업적 생산과 수출을 위해서 주로 하천 가까운곳에 가공하는 생산 시설이 만들어졌습니다. 실제로 평판이 높은 와인은 큰 이익이 커서 서로 좋은 지역에 포도를 재배할려고 했습니다.

웃긴건 코르크 마개와 유리병이 생기기 전에는 장기간 보관이 불가능해서 새 술의 판매가 가까워지면 작년 와인은 폭락했습니다. 그러기에 영주는 생산 직후 일정 기간, 자신이 생산한 와인을 독점적으로 먼저 판매할 권한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 외 작물로 섬유 산업의 원료가 되는 공예 작물들이 있습니다. 양에서 얻는 양모나 섬유 식물, 염료 식물 등도 재배했으며 14세기 이후에는 도시에 판매하는 채소와 과일, 허브 등이 활발하게 생산되었습니다.

특히 지중해에서는 기름인 올리브유를 재배해왔는데 13세기 이후 생산량이 많이 늘어났습니다.

 

목축

마을의 가축은 울타리를 친 방목지 외에 관목 지대 등에 방목되었습니다. 당시 휴한지에 나는 풀만으로는 가축을 키우는게 힘들기에 방목지나 목초지에 6월쯤에 건초를 수확하고 이후 풀이 자라면 방목하여 먹이는 방법을 사용했습니다. 또한 돼지의 경우 그냥 숲에 방사해서 가을쯤에 도살하여 보존식으로 만드는게 관습이였다고 합니다.

이때 돼지의 지방인 라드는 농민들의 식사에 필수였습니다. 올리브유와 버터가 있어도 비싼 사치품이였기에 유럽 전체에서 서민들이 식사에 애용했습니다. 또한 말과 소는 경작과 짐수레 운반으로 사용했고 양은 양모와 양피지를 얻는 용도로 키웠습니다.

우리나라의 일반적인 농촌처럼 닭이나 거위 오리등도 키워서 먹었고, 의외로 소고기랑 말고기를 자주 먹었다고 합니다.(아마 나이 들면 잡아먹은걸로 추정됩니다.) 14세기 이후 양과 소의 사육이 발전했습니다. (흑사병도 있고…) 차차 현대의 양의 방목지처럼 발전하게 됩니다. 웃긴건 제1차 인클로저 운동이 불리는데, 국왕 알폰소 10세가 이동 목양업자를 조직하고, 이동 방목 경로와 방목지 통제권을 주고 보호했습니다. 양치기 개 대신 기사단과 지배 계층이 운영했습니다.

 

산림

위에서 설명한 것처럼 마을 사람들에게 산림은 중요했습니다. 공유지에서 벌목하여 땔감이나 각종 열매들을 따서 식량으로 활용하고 돼지를 풀어서 나중에 도축하는 등 여러가지로 활용했습니다. 그 중 양봉은 좀 특별했습니다.

양봉업자들은 주로 숲에서 이루어졌습니다. 천연 벌집을 직접 채집하기도 했지만 짚으로 엮은 종 모양의 벌통을 사용했습니다.

중세시대 양봉업
중세시대 양봉 양식

사실 고대부터 양봉업은 활발했으며 신성 로마시절 황제 소유의 두 숲에는 직속 양봉원도 있었습니다. 이 양봉업자들은 봉밀금이란 조세를 바치는 대신 독립된 재판소 등 여러 특권을 인정 받았습니다.

이 밖에는 채굴지로 노천굴을 채광하는 경우가 많았는데 여기서 철광석이 생산되는 숯을 연료로 하는 노를 이용한 제철 작업 또한 삼림에서 이루어졌습니다. 차후 14세기에 수차를 이용한 송풍 장치가 발명되자 강가로 이동되었지만 그래도 숲에서는 멀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사람들은 더욱 이익을 위해 숲 속을 깊이 들어갔기에 판타지에서 나오는 은둔자나 무법자, 마법사가 있는 그런 상황이 될 수 없었습니다. 오죽하면 일부 삼림은 민둥산이 되어버릴 정도였습니다.

 

어업

교회에서 육식을 금지한 매주 금요일과 사순절에는 하천에서 물고기를 잡아 식사했습니다. 당시 철갑상어나 뱀장어가 인기 많았는데 잡아서 말리거나 절여서 판매했다고 합니다. 청어나 뱀장어로 유명한 플랑드르 백작령의 경우 12세기 후반에 생선 수입란에 뱀장어가 90%를 차지했다고 전해집니다.

웃긴건 서민들에게 고기에 비해 인기 있는 식재가 아니였다. 고작해라 금식일 대신 먹는 고기였다. 그래서 그런지 하천에서 어업을 종사하는 사람이 적었다고 합니다.

 

참고자료

서양 중세 문명, 독일 농민 전쟁(나무위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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