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세 판타지 정보글 17부 중세 전술과 무장 2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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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세 판타지 정보글 17부 중세 전술과 무장 2편
중세 공성전 장면

중세 판타지 정보글 17부 중세 전술과 무장 2편

1부에 이어서 중세 군대들이 어떤 식으로 전투를 수행했는지 이들이 사용한 통상적인 전술, 싸움 방법을 작성 했습니다. 대표 중세 군대 부대부터 시작하여 공성전까지 작성해보겠습니다.

중세 판타지 정보글 17부 중세 전술과 무장 2편

중갑기병 전술

전편에서 중세 기병이 본격적으로 활용된건 등자 전래로부터라고 서술했습니다. 4세기쯤 중국에서 발명되어, 중앙아시아의 침략자들을 통해 대략 6세기말에서 7세기초 유럽으로 전해졌고, 8세기쯤이 되면 유럽에서도 등자를 보편적으로 사용하게 된다. 등자가 있으면 말을 탄 사람이 말위에서 균형을 잡기가 좋고, 말에서 떨어질 가능성을 낮춰줍니다.

더욱 중요한 것은 말 위에서 등자를 발판으로 힘을 줄 수가 있게 된 것이다. 이 덕분에 중갑기병의 가장 중요한 두가지 무기와 싸움 방식, 즉 랜스를 들고 돌격을 하는 일과 말 위에서 장검을 휘두르는 일이 가능해졌다.

 

중갑기병의 전술 가운데 가장 중요한 것은 돌격 충격 공격(Shock charge)이다. 중갑기병들이 보통 4미터 정도되는 장창을 들고, 대열을 형성하여 적에게 돌격하면서 충격을 주는 방식이다.

보통 처음에는 느슨한 대형으로 말을 달리다가 점점 속도를 높이면서 대형을 갖추어, 최고속도에서 적의 전단과 충돌을 하는 것이다. 이때 가장 중요한 기술은 일정한 간격과 대열을 유지하면서, 가속을 해새 적의 전단과 충돌할 때 최대속도에 도달하는 것으로, 많은 연습이 필요하다.

보통 300-400미터의 거리를 15-20초 정도의 시간안에 주파하게 되는데, 방어를 하는 쪽이 보병일 경우에는 이때가 궁수들이 화살을 날리는 구간이 된다. 따라서 궁수들의 유효사거리 구간을 피해를 최소화하면서 돌파해야 한다. 중갑기병이 많은 경우에는 1열이 아닌 여러 열로 나누어 제파 공격 웨이브 어택을 하게 되는데, 통상 가장 무장이 잘 된 중갑기병이 1선에 서게 된다.

중갑기병의 돌격에 충돌하게 되는 수비측 병사는 제대로 맞는 경우 여러 명이 한꺼번에 넘어질 정도의 충격을 받게 되고, 심한 경우 장창 하나에 최전단 뒤의 병사까지 꿰뚫리기도 했다고 한다. 이렇게 돌격으로 적의 전단과 부딧히고 나면, 장창을 버리고 두번째 무기(장검, 전투용 도끼, 전투용 철퇴나 곤봉)를 써서 전투를 하게 된다. 이 모두가 등자가 있어야 가능한 기술이었다.

위처럼 장창으로 무장하고 밀집대형을 구성하고 있는 경우, 중갑기병의 돌격이 비 효율적이고 엄청난 피해를 감수해야 하기 때문에 내려서 전투를 했다고 한다.(사실상 불리한…) 크레시와 푸아티에 전투에서 잉글랜드의 중갑병은 말에서 내려 전투를 수행했다. 하지만 프랑스군은 중갑기병의 돌격에만 의존하는 전술을 구사했고, 잉글랜드 장궁병의 수비를 뚫지 못하는 것을 뻔히 보면서도 15차례나 중갑기병 돌격을 감행헀다고 한다.

보병 전술

보병 전술은 크게 중갑기병을 상대로 하는 경우의 전술과 다른 보병을 상대로 하는 전술로 나뉜다.

전술적으로 개활지에서 보병이 중갑기병을 이길 수 있는 방법은 두가지, 화력과 밀집대형 뿐이다. 이 방식은 알렉산더 대왕과 로마 시절부터 개발되어 발전된 아주 전통 있는 방식이다. 밀집대형을 형성한 후, 제일 바깥쪽에 장창을 높이에 맞춰 땅에 박아 단단한 창의 장막을 만들고, 활 투창 등 투척이나 발사무기로 엄호를 하는 방법이다.

여기에 적의 기병이 기동하기 힘든 지형을 선택할 수 있다면 최선의 효과를 기대할 수 있다. 이 방법은 레반트에서 아랍기병과 싸운 십자군에게도 효과가 있었고, 중세에 유명한 보병 승리를 만들어낸 플랑드르의 장창부대나, 잉글랜드의 장중병, 스위스의 장창병 등이 반복적으로 사용되었다.

Battle of Jaffa
Battle of Jaffa

중갑병 중심의 전투만을 하던 유럽의 기사중심 군대가 처음 보병의 필요성을 깨달은 것은 십자군 전쟁에서였다. 궁수들이 경기병 중심의 무슬림 부대를 저지하면, 중갑기병이 반격을 하는 방식이 성공을 거두었다. 살라딘의 군대와 싸워 대승을 거둔 1192년 자파 전투가 있다.

창병들은 자기 앞에 창을 땅에 박아 말그대로 “철창 울타리”를 쳤고, 창병들은 무릎앉아 자세로 대기를 했다. 그 뒤로는 석궁병들이 장전병의 도움을 받아 대기를 했다. 돌격해온 무슬림 경기병이 철창 울타리와 석궁수들의 화력에 저지되자, 리처드 왕은 뒤에서 대기하고 있던 중갑기병에게 돌격을 명했고, 살라딘은 후퇴했다.

1302년의 황금박차 전투에서는 장창병 앞에 개울이 있는 지형을 선택하여 프랑스 중갑기병의 말들이 기동하는데 방해가 되도록 도랑을 여러 개 파 놓았다. 마찬가지로 1314년 배넉번 전투 Battle of Bannockburn에서는 돌격해 오는 잉글랜드 기병의 말들이 빠지도록 스코틀랜드 장장병 진영 앞에 30센티미터 깊이의 함정을 잔뜩 파 놓았다고 한다. 하지만, 보병이 중갑병을 이기는 경우보다는 그렇지 못하는 경우가 많았고, 중세기간 내내 중갑기병은 많은 활약을 했다. 특히 적당한 지형에서의 기병의 우위는 상당했다.

 

보병간의 전투의 경우는 중갑기병이 줄 수 있는 돌격의 충격이 없기 때문에 대형의 유지와 질서의 유지가 결정적인 영향을 미친다. 백년전쟁(참조:나무위키) 시대에는 보병이 진격을 해서 공격을 해야 하는 경우를 불리하게 보았다. 공격을 위해 진격을 해야 할 때는 천천히, 보조를 맞춰서, 방향전환을 하지 않고 죽 나가는 것을 중시했다.

실제 두 보병간의 전투는 방패벽간의 전투인 경우가 많았기 때문에 한쪽의 전열이 무너지면 그대로 패배로 이어지기 경우가 많았다. 따라서 대열을 유지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했다. 살짝 살짝 기교가 사용되기도 했다. 백년전쟁 후반전의 서막을 알리는 전투였던 1415년 아쟁쿠르 전투에서는 영국과 프랑스의 보병끼리 전투를 하게 되었는데, 프랑스군이 달려와 돌격하는 형태가 되었다. 양쪽군이 충돌을 하려는 순간 잉글랜드군은 살짝 후퇴를 하여 프랑스군의 타이밍을 빼앗은 후, 다시 전진을 하는 기교를 벌였다고 한다.

아쟁쿠르 전투
아쟁쿠르 전투

 

궁수부대를 운영하는 경우에는 방어벽에 전진을 하면서 공격의 시작 역할을 주로 맡았다. 궁수들의 공격으로 전열이 무너지는 효과를 기대했다. 12세기가 되면서 유럽 전역에서 석궁이 일반화살을 대체하게 되었다. 대략적인 이유로는 훈련량이 적은것과 중갑기병의 장갑을 뚫기 위한 관통력 확보였다(장궁도 잘 훈련된 경우 석궁이랑 비슷한 관통력이였다)

궁수들을 사용할 때는 상대방 궁수들의 공격으로부터 보호를 하기 위해 파비스라는 커다란 방패를 운용했다(크레시 전투의 경우, 프랑스쪽에 있던 제노아 석궁병들이 행군을 금방 마친 상태에서 따로 싣고 왔을 파비스 없이 전투에 임하는 바람에 잉글랜드 장궁병들의 첫번째 희생양이 되기도 했다). 파비스의 사용은 역시 십자군 전쟁에서 개발된 방법으로, 특히 이탈리아에서 널리 사용되었다. 이후 근세 화약 도입 초기때 더욱 많이 사용했다.

공성전과 공성무기

기습이나 다른 특별한 방법이 아닌 경우에는 성을 포위 공격하여 점령하는 것은 많은 시간과 인원이 들어가는 무척 위험하고, 값비싼 전쟁 방법이었다. 따라서 공성전에 있어서는 다른 전투형태에서 일반적으로 지켜지는 기사도라는 나름 점잖은 룰들이 적용되지 않았다.

어떤 술책도 더럽거나, 나쁜 것이 아니었고, 하지 못할 일이 없었다. 배신을 유도하는 것이 성문을 여는 가장 좋은 방법이었다. 뇌물을 쓰더라도 내부의 배신자가 성문을 열어주거나 모르는 성채의 약점을 알려준다면 환영이었다. 수비측의 식량과 물을 오염시키거나 독을 퍼트리는 것도 많이 사용하는 방식이었다.

 

중세 공성전
중세 공성전 뭔가 반지의 제왕이 생각나네요

기본적으로 공성을 하기 위해서는 벽을 부수거나, 위로 또는 아래로 넘어가는 과정을 거쳐야 했다. 따라서 공성무기는 세가지 유형 중 하나에 해당하게 된다. 캐터펄트 또는 투석기는 무언가를 성벽에 또는 성벽너머로 날려보내는 무기이다.

이 무기는 공격과 수비측 모두가 사용했다. 공성추 Rams는 성벽이나 성문을 부수는 무기다. 공성탑은 공격측 병사들이 성벽을 넘을 수 있게 하는 무기이다. 이제 많이 사용하는 공성무기와 사용방법을 하나씩 살펴보자.

반지의 제왕 공성전
반지의 제왕 공성전(사다리)

보병 단계에서 기초적인 공성무기는 사다리입니다. 사다리를 사용하는 경우는 가장 중요한 것이 길이이다. 짧으면 당연히 성벽을 넘을 수 없고, 너무 길면 수비측 병사가 사다리를 밀어내 버릴 수 있습니다. 가장 이상적인 사다리는 길이가 바로 성벽 밑에 걸쳐지면서, 성벽에서 사다리 길이의 절반정도 떨어진 거리에서 걸칠 수 있고, 충분히 튼튼해야 했습니다.

따라서 성벽과 지형을 감안하여 사다리는 공격위치에 맞춰 현지에서 조립되는 경우가 많았다고 합니다. 아니면 로프나 가죽으로 만들어져서 위쪽에 후크가 있는 줄사다리도 사용했습니다. 주로 수비자들 몰래 성벽을 기어올라가기 위한 야간 기습공격에 유용했습니다.

수비측에서는 무언가를 아래로 던지거나 끓는 물, 기름, 역청 등을 뿌렸습니다. 또는 그물을 던져서 올라오는 적을 사로잡기도 했습니다다. 이에 대한 대응으로 공격자들은 큰 방패, 특히 윗부분이 휘어있거나 지붕이 달린 형태의 방패를 사용했습니다. 아예 사다리를 못 쓰도록 아래 사진처럼 성 주변에 해자를 구성했습니다.

중세 성 주변 해자
중세 성 주변 해자

 

공격하는 측이 사다리 이상의 방법을 사용하고 싶다면, 그리고 성벽 근처로 가고 싶다면 보호 지붕이 필수습니다. 수비쪽에서 화공을 해 올 수 있기 때문에 내화기능은 필수였다. 내화기능을 위해 가장 흔히 사용하는 방법은 새로 벗겨낸 생가죽을 씌우는 방법이 있습니다.(진흙도 사용하고..)

공성추 및 방어지붕
공성추 및 보호지붕과 불타는 기름과 화살들

 

공성추를 제작할 때의 고려사항은 충격량을 늘리기 위해 충격추의 무게를 늘리고, 가속도를 향상시키고, 공성추 운영 병력을 보호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다. 충격량을 늘리기 위해 공성추의 끝은 보통 금속으로 제작을 했고, 가속도를 늘리기 위해서는 공성추의 앞뒤 스윙 거리를 늘려야 하므로 로프 길이를 최대한 늘이는 방법을 사용했고, 생가죽을 씌운 지붕을 만들어 공격 병사들을 보호했다.

수비측에서는 공성추에 돌이나 뜨거운 액체를 붓는 등의 공격을 했고, 후크를 이용하여 공성추를 뒤집는 것을 시도하기도 했다. 공성추는 고대에서부터 사용하던 방식이기 때문에 수비측에서는 성을 디자인할 때부터 이를 감안했다. 통상 성벽 가운데는 공성추 높이 부분이 가장 두꺼웠고, 성벽 전채는 해자를 둘러 보호를 하고, 성문의 경우는 수비병들이 성문을 공격하는 공격측 병사들을 사방에서 공격할 수 있도록 성문을 둘러싼 성벽을 따로 만들었습니다. (조선은 화성?)

중세에는 공성추를 사용하는 새로운 방법들이 개발되었는데, 상대적으로 작은 공성추를 사다리에 매달거나, 성벽 밑에서 흙을 쌓아 공성추로 성벽의 윗부분을 공격하는 방법이었다. 통상 성벽의 윗부분은 아랫부분에 비해 얇기 때문이다.

반지의 제왕 공성탑
반지의 제왕 공성탑

14세기 무렵부터는 이전보다 성벽을 훨씬 높이 쌓기 시작했기 때문에, 사다리나 공성추를 사용하기가 어려워졌습니다. 이에 대한 대응이 공성탑을 사용하는 방법이었다.

20-25미터 높이의 공성탑을 사용하는 경우도 있었지만, 통상은 그것보다 낮은 탑을 사용하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공성탑 내부에는 계단과 대기장소들이 있었고, 공성탑 위에는 성벽으로 진입할 수 있도록 다리가 달렸다. 공성탑으로 공격하는 부분은 당연히 상당한 저항이 예상되기 때문에 벽이나 지붕을 다는 경우도 있었습니다.

공성탑을 성벽 가까이까지 이동을 시켜야 했기 때문에 아랫부분에는 바퀴가 필수적이었다. 공성탑은 무게가 상당했기 때문에 넘어지지 않도록 안정적으로 만드는 것이 중요했고, 이렇게 제작된 공성탑은 성벽 가까이 붙이는 것이 문제였다. 사람의 힘으로는 이동이 어려웠으므로, 보통 소나 말을 동원하여 이동시켰기 때문에 밀어서 이동시킬 수 없엇고, 끌어서 이동을 시켜야 했다.

이를 위해서는 일단 성벽까지 가는 길을 평평하게 만들어야 했고, 다음 성벽 가까이 기둥을 설치한 후 밧줄이나 사슬을 기둥에 걸어 지렛대의 원리로 공성탑을 성벽 가까이까지 이동을 시켜야 했다. 방어측에서 공성탑을 공격하는 가장 일반적인 방법은 화공을 하는 방법이었다. 따라서 공성탑은 만들 때부터 방화 기능을 감안해야 했다.

중세에 가장 일반적인 방법은 생가죽을 두르는 것이었다. 생가죽은 불에 타게 하기가 어려웠기 때문이다. 하지만, 비잔틴 제국군들은 화약를 사용했기 때문에, 비잔틴 제국의 성에는 공성탑을 사용할 수 없었다.

그 외에는 터널을 파서 성벽을 부시는 방법도 있긴 하지만 예외적이니 넘어가도록 하겠습니다.

투석기의 기본은 탄성과 비틀림 그리고 중력를 사용하는 방법입니다. 당시 스프링 역할을 위해서말꼬리털으로 만든 로프가 많이 사용되었다고 합니다. 이런 무기들은 주로 로마군이 개발한 것은 발리스타 스프링갈드 등이나, 투석기에 해당하는 오내저 망고넬 등이 사용되었으나, 로마제국 멸망 이후 복잡한 기계를 만들 수 있는 기술이 많이 쇠퇴하면서 여러 투석기류 무기들이 사라지고, 중세에는 중력식 트레뷰셋이 많이 사용되었다고 합니다. (게르만이 게르만 하였…)

로마 바리스타
로마 바리스타
로마 바리스타
로마 바리스타
동아시아 사다리차?
동아시아 사다리차?

 

중력식 트레뷰셋
장력식 트레뷰셋

장력식 트레뷰셋은 긴 막대를 짧은 쪽과 긴쪽이 생기도록 만들고, 짧은 쪽에 무거운 추를 달고, 긴 쪽에는 날려보낼 물건(보통은 돌)을 단 후, 무거운 추를 윈치 등을 이용해 높이 들었다가 갑자기 떨어뜨려 추의 중력으로 인한 반동으로 긴 쪽의 물건을 날려보냈습니다.

현재는 남아있는 트레뷰셋이 없기에 설계도를 바탕으로 재현한 트레뷰셋으로 실험해 본 결과, 4톤 정도의 균형추를 사용하면 8-12킬로그램의 물체를 450미터 정도, 100킬로그램의 물체는 183미터 정도 날릴 수 있었다. 아마 수비측 궁수의 사정거리를 벗어나 있어야 했을 것이므로 300미터 정도는 성벽과 떨어져 있어야 안정적으로 투석기를 운영할 수 있었을 것이라는 유튜브 내용이 있습니다. (한글로 검색하시면 게임만 나와요)

전투에서 트레뷰셋을 사용하는 방법은 동일한 무게의 균형추에 동일한 형태와 무게의 돌을 사용하면, 이론적으로는 같은 곳에 반복하여 발사가 가능하므로, 성벽의 동일한 지점을 트레뷰셋으로 반복적으로 타격하여 성벽 무너뜨리기를 시도하는 방법이 대표적이다. 또는 화염이나 벌집(작은 돌을 가득 채운 항아리)을 성벽 너머로 발사하여 성을 태우거나, 인명 살상을 시도하는 방법도 사용되었고, 심지어 시신이나 시신의 일부를 성벽 너머로 날려보내 심리전이나 생물학전을 사용하기도 했다. 몽골군이 활용하여 극악무도한 이미지가 생겼다(식인풍습이라든지)

 

하지만 유럽에 화약이 도입되고, 화포가 활성화되기 시작하면서 공성전의 방식은 크게 변화되기 시작한다. 참고로 1347년의 크레시 전투는 화포의 사용이 공식적으로 기록된 최초의 유럽전투였다. 하지만 당시의 화포는 성능이 불안정하여, 화포를 쏘는 사람 이외의 사람을 다치게 하기는 어려웠다고 한다. 그럼에도 화포가 만들어내는 폭음과 연기는 화포를 처음보는 적군과 적병의 말들에게 큰 충격을 주었다고 한다.

참고자료 : 나무위키 백과사전, 고대 공성전 유튜브(링크를 달고싶은데 달때마다 구글에서 이상 있다고 ㅈㄹ해서;;), 티스토리 공성병기와 패러다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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