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세 판타지 정보글 16부 중세 전술과 무장 1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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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세 판타지 정보글 16부 중세 전술과 무장

중세 전술의 변화에 대해 알아보고 어떤 식으로 전투를 수행했는지 이들이 사용한 통상적인 전술, 싸움 방법을 정리 예정입니다. 대충 흐름을 먼저 작성하고 무장 및 병력에 따른 전술은 담편에 작성하겠습니다.

 

중세 판타지 정보글 16부 중세 전술과 무장

중세 초기

로마 제국하면 번쩍이는 로리카 세그멘타타를 입고 빨간 스쿠툼을 왼손에 글라디우스를 오른손에 들은 로마 군단이 떠오르시겠지만, 서로마 제국이 멸망한 5세기 초반에는 그런 식의 로마 군단을 서로마 제국은 운용하지 못했습니다.

퇴보라는 얘기가 있지만, 동시에 그것이 변화라는 얘기도 있습니다. 우선 로마 군단이 사용하던 글라디우스는 장검이 아닌 단검이였습니다.

난전에서는 장검을 휘두를 공간이 부족하기에 글라디우스의 찌르기나 짧은 리치의 휘두르기가 더 효과적이였다고 로마 군단은 판단했기 때문이였습니다. 하지만 로마군의 주적이 게르만 족으로 변한 후 로마 제국은 게르만족의 방식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습니다.

효과적으로 게르만족을 상대하기 위해서 뿐만 아니라 로마 제국에 군기피 현상이 발생해 대부분의 군사력을 게르만 용병으로 메꿀 수 밖에 없었습니다. 군기피 현상이 없었다 해도 로마 제국의 국경은 너무도 넓었기에 용병은 어쩔 수 없는 선택이였습니다.

이때 대가로 게르만 용병들에게 그 당시 영주와 비슷한 지방 관제 관직을 주면서 더욱 로마 세력이 약해졌습니다. 단지 그 정도가 얼마나 되냐는 것이 문제였고 서로마 제국은 용병대장 오도아케르에 의해 멸망했으니 그 정도를 제대로 지키지 못했다라고 볼 수 있습니다.(이 후 게르만은 초기 중세처럼 영주와 귀족 계급이 탄생합니다)

 

 

초기 중세 유럽에서 사용됬던 무기는 대부분 장검, 단창 혹은 손도끼였습니다. 기병 전력은 한동안 극도로 부족했습니다.

기병전력이 초기 중세 유럽에서 대세가 된 것은 스페인 반도를 침략해온 이슬람 세력을 대항하기 위해 왕들이 전사들에게 땅을 주고 그 땅에서 말을 키워 타고오라는 명령을 내린 순간부터였다는 주장이 옛날에 있었지만 기병대를 운영하고 싶었지만 등자가 없어서 거의 불가능했습니다.

그러다가 훈족이 쳐들어오면서 등자가 들어오고나서 게르만족 중 프랑크족이 로마의 문화를 빠르게 받아드리고 왕국으로 탄생할 수 있었습니다. 서 유럽을 휩쓸면서 다녔는데 그 이유로는 카롤루스 대제가 메를빙거 왕조의 군제의 한계를 느끼면서 개편하면서 부터입니다. (이전에는 로마처럼 무장이 빈약하고 보병, 궁병 운영을 안했습니다.)

부족 단위에서는 강력했지만(약탈 위주의 생활) 왕국으로 들어오면서 농부가 되자 전투력이 약해졌습니다. 그러기에 기병과 정예병의 필요성을 느끼면서 귀족 위주로 기마대를 구성했습니다. (그 당시는 셀프 무장이였고 돈이 많이 필요했습니다) ->당시 무장비용이 소 45마리가 필요했다고 합니다 1명의 기병을 만드는데…

그 당시 잘 무장하고 훈련을 받은 군대가 드물었기에 엄청나게 강했습니다. 그 강함에 반하여 카롤루스 대제가 거의 보병급으로 기마대를 창설합니다. 다만 비용이 너무 비싸서(창렬) 귀족에게 의무로 줬습니다. 이것이 기사의 기원이 되었습니다.

 

서유럽은 그렇게 기병전력이 주력이 되었던 아니면 봉건제의 힘으로 급격히 주력이 되었던 초기 중세의 유럽 전장은 서서히 기사계급을 중심으로 돌아가게 됬습니다.

이때는 아직 판갑이 정착되지 않은 때였고 대부분의 기사들은 체인 메일을 입었습니다. 보병과 궁병은 오로지 보조적인 목적으로만 존재했고 주력은 기사계급이였으며 보병과 궁병의 임무는 적 보병에게 돌격 후 재집결을 위해 후방으로 후퇴하는 기사 계급을 위해 시간을 벌어주는 것이였습니다.

궁병으로 선제사격을 가해 전열에 구멍을 뚫은 후 기병을 돌격해 적 보병진의 전열을 뒤흔들어 놓은 다음 보병을 돌격시켜 적을 마무리하는 전술도 가끔 사용됬었습니다.(전열만 뒤흔들어주면 역할이 거의 끝났다해도 무방합니다.)

 

 

하지만 그런 흐름으로부터 동떨어진 곳들이 있었습니다. 비잔틴 제국, 슬라브 족, 북게르만 족. 비잔틴 제국의 보병은 과거 기병용 장검이였던 스파타와 체인메일과 라운드 쉴드로 무장했었고 예산상 필룸을 사용할 수 없었기에 거대한 다트를 보병용 원거리 무기로 사용했었습니다.

그 다트는 어느정도 필룸을 대체할만한 효과가 있었고 무엇보다 경제적이였습니다. 하지만 스파타와 라운드 쉴드가 항상 대세였던 것은 아니고 카이트 쉴드와 창이 대세인 적도 있고 손도끼가 대세였던 적도 있으니 주무장이 어떤 것이였냐는 항상 유기적으로 변화했다 할 수 있습니다.

로리카 세그멘타타는 사용되지 않았지만 로리카 세그멘타타는 로마 제국이 한참 번영하던 제정 초기에도 의장용으로만 사용됬다는 설이 대세니 큰 의미는 없다 할 수 있습니다.

 

 

또한, 비잔틴 제국은 서유럽에서 기사계급이 발호하기 전부터 잘 짜여진 중장기병을 보유하고 있었습니다.

흔히 카타프락토이라 불리는 그들은 동방의 중장기병을 상대하기 위해 제정 로마때부터 사용되어 왔으며 비잔틴 제국의 주력중 하나였습니다. 궁병진도 보유하고 있을 것이라 추측합니다.(이 부분은 참조사항 링크 확인)

비잔틴 제국은 로마 시대의 발달 된 군제와 전술들을 물려받았기에 서유럽이 잠시나마 일차원적인 전술로 퇴보한 것과 달리 여전히 다 차원적인 전술을 사용하고 있었습니다.

이들은 망치와 모루 전술도, 방패벽 전술, 거짓 퇴각 전술, 매복과 기습, 힛앤런 게릴라 전술, 포위및 원거리 섬멸 전술, 냉병기로 사용될 수 있는 전술이라면 거의 대부분 사용했다고 보시면 됩니다.

 

 

슬라브 족은 유목민들로부터 영향을 받아 다수의 경기병과 투창및 손도끼로 무장한 경장보병을 주로 보유하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들의 무장은 당연하지만 제대로 정해진 것이 없었고 부족에서 부족민들이 스스로 무장을 챙겨 전쟁터로 나가는 것이였습니다.

이들의 전략은 간단했습니다. 투창으로 적을 녹이고 돌격해 죽인다. 적이 너무 강하면 도망쳐서 다음 기회를 노리고 적이 약하다면 죽이고 약탈한다.

 

북게르만 족의 무기와 전술

모든 게르만 족들은 스칸디나비아반도 출신입니다. 롬바르드족, 프랑크족, 브루군디족, 고트족, 반달족, 그 외 다양한 부족들 모두 스칸디나비아 반도에서 왔습니다.

대부분의 게르만족들이 그나마 살만한 남쪽으로 무섭게 침공해간 후에도 스칸디나비아 반도에는 다수의 게르만들이 남아있었는대, 바로 이들을 모두 합쳐 북게르만이라 부르고 나누자면 노르웨이계 스웨덴계 덴마크계로 나뉩니다.

이쪽은 기병을 사용하지 않았습니다. 일부는 기병을 사용했을 수도 있습니다.

 

주 전략은 롱보트를 통한 빠른 해상기동력으로 펼치는 힛앤런이였기 때문일 것입니다. 말을 배에 태우고 먹이는 것은 전혀 쉬운 일이 아니며 효과적이라 보기도 힘들었어서 보병 위주의 손도끼 및 장창과 라운드쉴드로 무장했습니다.

궁수는 존재하긴 했지만 소수였고 원거리는 대부분 손도끼 투척으로 매꿨습니다. 전투시에는 부족단위로 무작정 중장보병 돌격을 하거나 방패를 이어서 만든 거대한 방패벽으로 적의 공격을 막아내는 식의 전술을 사용했습니다.

영국의 로마화 된 켈트족을 침략한 앵글로족과 색슨족도 이런 식의 전술을 사용했습니다. 참고로 영국에 정착한 허스칼들은 더 이상 약탈자들이 아니였기에 말을 타긴 했지만 그들은 전장까지만 말을 타고 가서 전장에서는 말에서 내려 보병으로 싸웠습니다.

관련 이유로 정통도 있지만 말의 체력이나 값어치에 때문에 참전에 제외했다는 이야기도 있었습니다.

 

 

초기 중세를 정리하자면, 로마에서 시작한 중장보병부대 조합에서 중장기병 및 보조하는 경장보병 조합으로 넘어가는 시기라 할 수 있습니다.

일부 지역에서는 초기 중세 전부터 중장기병을 사용했었고 일부 지역에서는 초기 중세 이후에도 중장보병을 사용했습니다. 참고로 봉건제 이전의 게르만 족들도 기병을 잘 사용했습니다. 로마 제국은 전통적인 농업국가라 기병은 대부분 외부 속주로부터 보조병으로 수입해왔는데 당시 사용하던 기병은 대부분 켈트족이나 게르만족이였습니다.

훈족처럼 아주 타고난 기병이였다고 합니다. (훈족이 6세기에 쳐들어왔으니 영향을 받았다고 할 수 있다고 합니다.)

중세 중기

1066년에 흥미로운 사건이 하나 있었는대, 바로 봉건기사와 앵글로색슨 허스칼들의 충돌이였습니다. 바로 노르만족의 잉글랜드 침략전쟁, 윌리엄의 군대는 당시로서는 최첨단인 군대였습니다. 잘 짜여진 석궁병들과 잘 짜여진 보병진들과 잘 짜여진 기병진, 이 세가지가 적절히 혼합 되 뛰어난 적응성과 위력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에 비해 앵글로색슨 허스칼들은 당시로서는 구식인 군대였습니다.

 

당시 사용했던 전술은

1. 전통적인 방패벽 전술은 분명 적합한 위치에서 적합한 군대로 적합하게 사용한다면 극도로 효과적이다.

2. 기보궁 삼병종이 적절하게 혼합 된 군대는 어디에서든지 효과적이지만 동시에 특별한 강점이 없다.

3. 전통적인 방패벽 전술은 적합한 위치에서 적합한 군대로 적합하게 사용한다면 혼합군대도 무찌를 수 있다.

 

만약 해롤드 고드윈슨의 양익이 후퇴하지 않아 노르만군이 방패벽을 포위섬멸하지 못했다면, 헤이스팅스 전투는 해롤드 고드윈슨의 승리로 끝났을 것입니다.

하지만 동시에 해롤드 고드윈슨이 양익이 자연적으로 막혀 정면밖에 침투로가 없는 언덕에서 싸우는 대신 탁 트인 평야에서 싸웠거나 두터운 숲속에서 싸웠거나 찐득한 늪지에서 싸웠다면 어떻게 되었을까요? 평야에서 싸웠다면 해롤드 고드윈슨의 허스칼들은 노르만 기사들의 연속된 돌격에 서서히 무너졌거나, 노르만 기사들의 양익포위에 의해 섬멸되었을 것입니다.

헤이스팅스 전투에서 노르만 기사들이 충분히 효과적이지 못했던 이유는 언덕을 올라가느라 말들이 지쳐있었기 때문이니까요. 만약 두터운 숲속에서 싸웠다면 해롤드 고드윈슨은 방패벽을 형성하지 못했겠고 두 지휘관들의 역량싸움이 됬을 것입니다.

만약 찐득한 늪지에서 싸웠다면 중무장한 허스칼들은 발이 묶인 사이 노르만군의 석궁병 포화에 심각한 피해를 입어 패배했을 것입니다. 가장 효과적인 군대는 특정한 지형에서만 무적인 군대가 아니라 어느 지형에서든 효과적으로 싸울 수 있는 군대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무적 팔랑크스가 로마 군단에게 패배했던 것입니다. 팔랑크스는 평지에서는 무적이였지만 진열을 제대로 짤 수 없는 나머지 지형에서는 사실상 무용지물이나 다름없었으니까요. 그 점을 헤이스팅스 전투는 분명하게 증명해냈습니다.

 

중세 후기

한편 후기 중세는 기존의 패러다임을 깨부수는 다양한 전략들이 나타났습니다. 우선 잉글랜드에서는 웨일즈 지방에서만 사용되던 롱보우가 자유농민들 사이에 퍼져나갔습니다.

잉글랜드에서는 롱보우가 뛰어난 오락거리로 여겨졌습니다. 영주의 숲에서 몰래 사냥도 한다면 고기도 얻을 수 있었지요. 롱보우는 최대사거리가 150미터로 석궁보다 약간 긴 수준이였지만 특별히 무거운 화살촉을 사용할 시 판갑을 관통할 수 있을만한 사거리는 20m 내외였습니다.

흔히 갑옷은 롱보우를 튕겨낼 수 있어서 석궁이 발달한 것으로 많이들 알고 계시겠지만 지속적으로 포화에 놓이게 되면 철판도 관통될 수 있습니다. 그렇다고 석궁이 더 좋은것도 아니였습니다. 다만 오랜 시간의 훈련량이 필요 없어서 석궁이 채택된 영향이 더 컸습니다.

 

백년전쟁 때 사용된 롱보우 전술은 다음과 같습니다. 기사와 롱보우 궁수를 혼합해서 진형을 짜고, 롱보우 궁수가 원거리에서부터 적의 숫자를 줄이면 약해진 틈을 기사가 파고들어서 격퇴한다.

이때 롱보우는 위력을 위해 주로 곡사가 아닌 직사로 발사되었었고 그것을 위해 기사의 뒤가 아니라 기사의 사이사이에 궁수들이 배치됬었습니다. 이 전술의 단점은 원거리에서 제압되면 위력을 상실한다는 것이였고, 초기 포병대를 프랑스군이 대규모로 운용하기 시작하자 패배했습니다.

 

 

추가적으로 파이크 전술도 있습니다. 초기부터 있었지만 체계적인 무장과 훈련으로 편성된것은 후기였습니다. 스위스 용병단이 대표적입니다.

스위스 용병단은 잘 짜인 파이크 방진으로 기사돌격을 막거나 보병들을 원거리에서부터 조직적으로 제압하였고 그 외 석궁병과 할버드 병으로 이루어져 있었습니다. 파이크는 4m 길이의 돌격용 랜스보다 더 긴 5m에서 6m 사이의 길이를 가지고 있었고, 흔히 알려진 것과 달리 기병을 섬멸하는 것이 아닌 기병을 저지하는 용도로 사용됬었습니다.

돌격해오는 기사와 파이크가 부딪친다면 파이크가 판갑을 관통할 수도 있을 것 같지만, 현실에서는 파이크가 판갑과 충돌시 부러지며 대부분의 반발력을 상실했기에 관통하기가 힘들었습니다.

말이 파이크와 충돌한다면 말을 죽일 수는 있었겠지만 마갑을 입히기 시작한 이후에는 그것도 힘들어져갔습니다. 그렇게 파이크가 돌격을 저지한 후에 기사를 공격하는 역활은 파이크의 보호 아래 놓인 석궁병과 할버드 병이였습니다. 기사가 진형내로 돌격해온다면 할버드병이 기사를 처리했고 재돌격을 위해 후방으로 후퇴한다면 석궁병이 원거리에서 기사를 처리했습니다.

파이크 전술은 스페인의 테르시오 전술이 등장하기까지는 사실상 거의 무적이였습니다. 다만 카를 5세의 란츠크네히트와 아퀘부지어들에게 15세기에 패배 됬었고 그것은 이탈리아 르네상스에 크나큰 피해를 입힌 사코 디 로마, 로마의 약탈로 이어졌었습니다.

하지만 이때 카를 5세가 사용한 것은 파이크 전술과 기병 전술의 혼합이자 변형이였습니다.

번외로 란츠크네히트는 파이크 병과 쯔바이핸더라는 양손검병이 혼합 된 신성로마제국의 용병단이였고, 아퀘부지어는 아퀘부스라는 초기형 화약무기를 사용하는 병종이였습니다. 카를 5세의 군대는 란츠크네히트가 파이크, 쯔바이핸더가 할버드, 아퀘부지어가 석궁병의 역활을 담당했었다 볼 수 있습니다.

 

중세 사람들이 바보는 아니니 파이크 전술에 대비하는 기병들을 가지고 있긴 했었습니다. 바로 윙드 후사르. 윙드 후사르는 파이크가 랜스보다 길어서 기병돌격이 저지된다면, 파이크보다 긴 랜스를 사용하면 되지 않느냐라는 아이디어로 창설 된 기병들이였습니다.

윙드 후사르는 동유럽에서만 사용된 병종이였지만 그들의 아이디어는 나머지 지역의 일부 기사들에게도 전파되어 사용했습니다. 하지만 펼치기 매우 힘들어 소수의 정예만 가능하기에 윙드 후사르는 대세 전략이라 부를 수는 없었고 파이크 전술에 대한 원천적인 카운터라고 부르기 힘들었습니다.

 

근세

테르시오 전술은 오랫동안 지속되온 레콩키스타를 끝낸 스페인에 의해 만들어졌습니다. 오랜 숙적인 이슬람 세력의 방식을 받아들여 투창 경기병을 주력으로 가지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 전술은 스페인이 유럽세계의 전장에서까지 사용하기에는 흠이 많다는 평이 나왔고, 그 결과 테르시오 전술이 만들어졌습니다.

테르시오 전술은 기본적으로 파이크 전술에 신무기인 총을 대대적으로 도입한 전술이였습니다. 테르시오 전술은 기본적으로 5개의 사각형으로 이루어져 있었는대, 중앙의 사각형에는 파이크 병들이 배치되고 그 사각형의 모서리마다 배치 된 4개의 사각형들에는 아퀘부지어들이 배치됬었습니다.

행군을 하다가 전투가 시작되면 총병들을 파이크 병들의 내부로 이동시켜 보호했습니다. 총병에 대다수를 의존하지만 근접전에 대비해 파이크 병들도 배치했다는 점에서, 테르시오 전술은 기존 냉병기들의 싸움에서 총기들의 싸움으로 넘어가는 과도기를 상징하는 전술이라 할 수 있습니다.

테르시오 전술은 한동안 무적이였고, 그것에 대응하며 권총 기병이 방진의 지근거리까지 돌격해 권총을 발사하고 후퇴하는 카라콜 전술이 등장하기는 했지만 대응일 뿐 카운터라 보기는 힘들었습니다. 대포의 발달로 방진을 깨부술 수 있게 되며 총검의 발달로 장창병 없이 순수 총병으로만 이루어진 선형진들이 등장하고 나서야 원천적인 카운터가 됬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몰론 여기서부터는 근세여서…

 

번외

중세에는 중기에는 활을 사용하는 것을 유럽인들은 비겁하게 여겼다고 전해집니다.(기사도… 웃긴건 총은 안 비겁…) 당시 유럽에서는 좋은 활을 만들기가 어려웠고, 그 활의 사거리도 그다지 좋지 않았습니다. 추가로 중세의 전쟁은 귀족의 전쟁인 만큼 말이 활은 사냥이나 암살 등에나 쓰일 것이라 여겼지, 대규모적인 부대를 운영한 기록이 서양에는 많지 않습니다.

그 당시에는 어처피 귀족 계층인 기사들은 죽을 위험도 없고(몸값을 받으면 풀어줬습니다.) 영지전은 사실상 비니지스 사업이였습니다. 삥뜯기… 그리고 정규군을 운영할 만큼 영지 수입이 넉넉하지 않았습니다. (프랑스같은 애들은 예외)

일단 보병부대는 통상 농노들로 이루어졌으며 활이라는 것은 아주 쏘기 쉬울 것 같지만 많은 훈련이 필요한 무기입니다. 또한 그렇다고 해도 명중률이 좋지 않았습니다. 그에 반해서 창이나 칼은 쥐어주고 전장에 보내기만 하면, 싸울 수 있게 됩니다. 죽던 살던 아무튼 가까이 붙어 있으니 찌르거나 베기만 하면 공격이 가능했습니다.

또한 던지는 창이나 투석기(손)에 비해 손도 많이 가고 명중률도 낮아서 운용을 잘 안했습니다. 유지비도 비싸고 이때에는 중갑 보병이 주세였습니다. 얼마 후 기병의 유용성을 알게 된 후 기병이 득세하게 되었죠.(거의 전차) 이런 기병들은 그만큼의 숙련도를 꼭 필요로하기 때문에 이들을 특별히 기사라는 칭호를 내려주었습니다.

하지만 말이나 갑옷등의 유지비가 많이 들게되기 때문에 기사는 귀족들의 칭호로 변질되게 되었죠. 몽골의 침입 때 활의 무서움을 접하게 되고 아마 백년전쟁 떄 왕이 평민들을 모아 활과 창으로 무장시켜 프랑스의 강한 기병들을 상대로 지형을 이용해 승리를 거두었습니다.

전투중에 기병들은 발달 된 활의 좋은 표적이 되어 가장 먼저 죽게되었습니다. 그래서 이를 방지하기 위해 갑옷이 판금메일 들로 만들어지고 관절 부위들까지 완전방어하는 풀플레이트가 생겨 나게 되었습니다. (그 당시 프랑스 기병대도 무식하게 무조건 앞으로 전진할려고해서 생긴 일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이렇게 발달된 갑옷은 그 무게로 인해 기병의 이점인 속도와 민첩성이 사라지게 되었고 결국 대포에 의해 성이 사라진 것처럼 총이 개발되면서 갑옷을 입은 기사는 더이상 필요가 없게 되고 갑옷은 단지 흉갑정도만 남았다가 이도 완전히 사라지게 되었죠.

 

참고자료 : http://myarmoury.com/features.html , https://www.thearma.org/manuals.htm 둘다 유명한곳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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