징집병과 용병
중세의 군대는 기본적으로 징집병과 용병이 있습니다. 이 당시 귀족들의 의무 병역 일수는 약 40일이였으며 채우자마자 전장에서 돌아가는 경우도 많았다고 합니다. 그러기에 나라에서 써먹기 힘들기에 징집병(농노X)나 용병을 많이 기용했다고 합니다.
통상 용병은 첫째가 아니어서 가문의 영지나 귀족 타이틀을 물려받을 수 없는 둘째나 셋째 아들 같은 경우, 상속재산을 제대로 받지 못한 혼외자들, 그리고 농지가 없는 농민이나 고용이 불안정한 직공들이 용병의 기본 구성이었고, 이들이 14세기를 넘어가면 개인단위가 아닌 용병대 단위(루티에 Routiers)로 고용 가능한 전문 군사집단으로 성장해 있게 된다.
이중에는 전문 훈련을 받아 나름의 명성을 쌓게 된 용병집단도 생겨난다. 예를 들어 크레시나 푸아티에 전투에도 참여했었던 제노아의 석궁부대, 백년전쟁 후반에 등장하는 스위스의 장창병 부대, 그밖에 플랑드르의 장창병, 그리고 백년전쟁 중 구성되는 잉글랜드, 가스코뉴, 브리타뉴의 루티에들이 이런 자원이 된다.
항상 고용이 가능한 전문직이지만 쉽게 변절을 하거나, 다른 목적을 갖는 경우가 많아 신뢰성이 떨어지는 문제가 많았습니다. 그것도 14세기쯤이 되면 징집병들도 급여가 지급되면서 용병대와 징집병간의 차이는 줄어들었습니다.
기사와 중갑병, 경기병
군대의 구성 중 중요한 군사는 당연히 중갑병입니다. 갑옷과 무기를 갖추고, 전문적인 훈련도 받은 직업군인입니다. 그리고 이들은 대부분 말을 갖춘 기병이기도 했습니다. 그 무거운 갑옷과 무기를 소지하고 걸어다닌다는 것은 현실적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기에 많은 시간과 돈이 필요했기에 기사=귀족이라는 인식이 생길 정도였습니다. 몰론 나중에 부유한 평민이나 일부 용병들도 장비를 구비하긴 했습니다.
기사의 구성은 깃발기사(중대장 포지션), 일반기사(소대장), 수련기사(생도?) 구별되었습니다.
장궁병과 석궁병
장궁병들은 통상 두 다스(24발)의 화살을 활통에 넣어 다녔다고 하고, 이후 필요한 화살은 마차로 싣고 다니면서 보급병들이 나누어주었다고 한다. 크레시 전투를 상상해 보면 당시 대략 6천명 정도의 장궁병들이 전투에 참여했다고 하고, 이들이 하루종일 쏜 화살의 수는 50만발 정도였던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이 정도 규모의 장궁병들이 최대발사속도로 사격을 하면, 실제 하늘을 가릴 정도로 화살이 날아왔다고 한다. 장궁은 크레시 전투 이전에는 대륙유럽에 소개된 적이 없는 신무기였다. 따라서 이런 효과적인 신무기의 도입은 적에게 상당히 효과적인 타격을 입혔고, 전쟁의 양상을 바꾸어 놓을 수 있었다.
하지만 장궁이 장점만 있는 것은 아니었다. 장궁의 최대 단점은 석궁에 비해 사용하기가 어렵고, 따라서 훈련기간이 상당히 필요했다는 점이었다. 장궁을 팔을 편 채, 활줄을 귀까지 당겨 사거리를 확보하고, 조준을 해서 표적을 맞추기 위해서는 상당한 훈련기간이 필요했고, 이 때문에 장궁을 전략 무기로 도입한 잉글랜드는 예컨데 에드워드 1세의 시기에는 모든 평민남자들이 일요일마다 마을 단위로 활쏘기 연습을 하도록 법으로 정했을 정도라고 합니다.
국가적 차원에서 정한 전략적 무기였던만큼, 국가에서 활과 화살의 제작을 관리했고, 런던탑에는 항상 활과 화살의 재고를 충분히 비축되어 있었다고 한다. 그리고 한가지 집고 넘어가야 할 것은 장궁은 공격용 무기라기 보다는 수비용 무기에 가깝다는 것이었다. 가장 장궁을 효율적으로 사용할 수 있는 경우는 장궁병들이 대형을 유지하고, 킬존을 설정하여 탄막을 형성할 수 있는 집단사격을 하는 방식이었다.
이런 방식은 방어형 전투를 할 때 사용하기 좋은 전략이며, 궁수가 이동을 해야 하는 공격시에는 당연히 효율이 떨어졌다. 이에 반해 석궁의 경우, 조작과 조준이 상대적으로 쉽기 때문에 장비만 충분히 있다면 훈련이 안된 징집병들에게도 바로 사용하도록 할 수 있는 것이 장점이었다. 특히 공성전의 경우에는 수비대의 경우, 몸을 엄폐할 수 있는 곳이 많기 때문에 훨씬 효율적으로 사용할 수 있는 무기가 석궁이었습니다.
상대적으로 운용이 쉬운 석궁이라고는 했지만, 석궁 역시 오랜 훈련을 받은 전문 석궁병들의 효율이 당연히 좋았고, 중세 유럽에서는 석궁을 주된 무기로 사용하는 용병이 제법 있었다고 한다. 가장 유명한 것이 제노아의 석궁부대였고, 이들은 크레시와 푸아티에 전투에서 프랑스군으로 참여를 한 바 있다.
장궁병이건, 석궁병이건 화살이 떨어졌을 때나 초근접전에서는 활을 무기로 사용할 수 없었으므로, 단검이나 도끼 등 근접전 무기도 소지하는 것이 일반적이었고, 근접전이 되는 경우에는 당연히 보병으로서의 역할을 수행했다. 잉글랜드군의 경우 보병도 상당수 있었고, 이들은 척후병이나 산병으로서의 역할을 주로 수행했습니다.
단검병과 장창병
주된 임무는 척후병, 산병 및 측면 방어였지만, 근접전이 벌어지면 중갑기병의 뒤쪽으로 몰래 가가가 말의 배를 찔러 중갑기병을 말에서 떨어뜨린 후, 달려들어 단검으로 찌르는 형태의 전투를 했던 것으로 추정된다고 전해집니다.
장창병들은 중갑기병들을 상대로 대응을 하거나 심지어 승리를 할 수 있었던 것은 고대 그리스에서부터 개발된 장창병의 밀집대형, 일명 팔랑스가 효력을 발휘했기 때문이다.
팔랑스 밀집대형에 궁수들의 화력이 더해지거나(1347년 크레시 전투), 밀집대형 앞에 중갑기병들의 말이 빠질 수 있는 함정을 잔뜩 파 놓아 중갑기병들의 돌격 속도를 줄이는 방법이 밀집대형에 더해지는 등(1302년 황금박차 전투와 1314년 배넉번 전투) 여러 전술을 사용하여 훈련된 보병부대들이 중갑기병을 물리친 전투들이 실제로 일어났고, 이후 보병들, 특히 궁수나 장창병들의 중요성이 부각되면서 14세기 보병혁명이라고 부르기까지 하고 있다.
참고자료 나무위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