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편 중세 농민의 생활 1부를 이어서 2부를 시작하도록 하겠습니다. 마을 즉 농촌은 그 당시 거래나 협상때나 밖으로 나갔는데요. 그러기에 대부분의 영역에서 자급자족하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앞에서 말한 제분, 빵 굽기, 와인 맥주 등의 식품 공업을 많이 했습니다. 하지만 그 외에도 여러가지 수공업이 있었습니다. 특히 음식이 중요했기에 기본적으로 식량을 중심으로 발달했기에 당시 마을의 기록에도 주로 농업이나 목축 작업이 대부분을 차지했습니다.
하지만 수공업 또한 확실하게 발달하고 있었습니다.
마을 공업
대표적으로 공업으로는 대장장이가 있습니다. 보통 영주를 섬기는 직인으로서 말에 편자를 박는 일이나 마을 농기구 제조 등을 했습니다. 기술과 지원이 필요해서 마을에 하나 있는 경우가 대부분였습니다.
마을 사람들은 철을 가지고 대장간에 가져다주면서 제작비를 지불하고 의뢰해야 했습니다. 마을의 대장간의 불이 꺼지는 경우가 없다고 전해지니 유추한다면 수요가 많았다는걸 의미하며 각종 철제 농기구가 보급되었다는걸 유추할 수 있었습니다.
기록으로는 대장장이가 제조하는 농기구는 밭가는 도구부터 곡식을 수확하는 작은 낫, 대형 낫, 손도끼~도끼 등 무기류에 이르렀습니다. 지금도 옛날 농촌 대장간에는 편자를 박을 때 말이나 소를 고정하는 설비가 남아있습니다.
또 가축의 가죽을 무두질하여 구두나 가방 등 가죽 제품의 원재료를 생산하는 피혁업은(피혁은 피와 가죽을 뜻합니다) 생산지인 마을과 수요가 많은 도시에서 틈새시장이였습니다. 하지만 무두질에 많은 물이 필요해서 공급이 용이한 하천 근처에 짓어졌습니다.
섬유 산업도 빼놓으면 아쉽습니다. 여성이 노동할 수 있는 분야중 거의 유일한 하나가 여기입니다. 모직물부터 다양한 작물을 만들어내는 사업을 많이 했습니다. 각중 제사 작업이나 베짜기 등 작업의 대부분 마을 여성들의 가내노동으로 돌아갔습니다.
차차 공장처럼 전문화되어 분업화된건 11세기 이후였습니다. (도시에서 작업했다고 전해집니다.)
이 밖에는 도기 제작은 겨울 농한기에 바싹 부업으로 하거나, 올리브나 호두에서 기름을 짜고, 오크통 제조 등 대부분 자급자족했습니다.
마을의 정기시(한국의 5일장 비슷한거)
마을은 영주에게 매년 공물(세금)을 받쳐야 했으며, 남는 농산물은 시장에 팔아서 필요한걸 구매도 해야했습니다. 그래서 중세에는 유통 분업이 안되어 있어서 직접 발품을 파는게 일반적이였습니다.
마을이라도 그 지역 경제의 중심인 경우 중소도시처럼 정기시(5일장)이 열리는 일이 적지 않았습니다. 사실상 마을과 작은 도시의 구분하는 경계라고 볼 수 있었다.
마을의 정기시는 매주 열리는 마켓이 있고,1년 중 특정 시기에만 열리는 페어가 있었습니다. 전자는 주시, 후자는 연시라고 불렀으며 보통 교회 미사를 드리는 일요일에 사람이 몰리기에 자연스럽게 열렸습니다.
교구민의 물물교환이 기원으로 보여집니다. 하지만 기독교에서는 안식일이기 때문에 교회의 교육으로 차츰 평일로 변경되었습니다.
이러한 정기시는 12~14세기에 발달했고, 프랑스는 따로 영주가 정기시 권한을 국왕에게 구매했다는 내용이 있고 다른 지역은 7~10km 간격으로 한국의 5일장처럼 하루 차이로 정기시가 열렸다고 합니다.
이러한 정기시는 영주의 또 다른 소득원이였습니다. 한 14세기부터 영주는 치안 유지 및 거래의 보증의 대가로 시장 이용세와 점포 개설세를 받았습니다.
이렇게 주기적으로 세금을 뜯어가는 영주하고 농민의 관계는 어쩔까?
농민의 영주에 대한 의무
로마시대에는 국민이 곧 자유민(병역의 의무를 지고있는)이였는데 프랑크 시대에는 자유민 부자유민으로 나뉘었습니다. 그러다가 13세기까지 점점 영주의 밭에 농민이 동원되는 경우가 감소했습니다. 차차 영주들은 새로운 계급인 귀족으로 변화되었고 농민은 도시민과 평민으로 바뀌었습니다. 거기에 로마때부터 신분이 보장된 성직자까지 포함되어
‘기도하는 자'(성직자), ‘싸우는 자'(귀족, 기사), ‘경작하는자'(농민) 로 나뉘어졌습니다. 사실상 이렇게 3가지 계층으로 고정되고 인구 구조가 귀족이 약 1~2프로, 기사가 5~6%, 성직자가 3~4%로 특권 계층은 약 10% 전후였고 나머지 존재들은 다 농민이였습니다.
본래 성직자를 제외하고 귀족과 농민은 차이가 없었습니다. 13세기 전까지는 스스로 귀족이라고 자칭하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하지만 13세기경 공직적으로 왕이 기사 서임식으로(호출권) 삼고 종교를 활용하여 이 무력 집단을 통제하려는 의도와 맞물려 오늘날의 귀족이 탄생하게 됩니다.
추가로 명확하게 구별되지 않는 농민과 자신들을 나누기 위해서 여러 방법으로 꾸준히 평민층을 깍아내렸습니다. 또한 계급에 따라 먹을거리에도 귀천을 나누었는데 하늘에 가까운것에 따라 뿌리 식물인 순무나 양파 감자는 천한 음식이고 농민들의 음식으로 여겨졌습니다.
거기에 영주들은 연 수입을 늘리기 위해서 농민들의 거주지 및 외부 이동을 엄격히 통제했으며 결혼해서 영지를 떠나는 경우에는 영외혼인세를 매겨 못떠나도록 유도했습니다. 거기에 상속인이 없으면 전 재산이 몰수했으며, 상속인이 있다해도 사망세를 보과하여 착취했습니다.
그래서 경제가 발전하는 시기에는 영주의 보호라는 측면이 약해지고 착취는 강해져 영주에게 예속되는 부담이 싫어 도시로 도망가고자 노력했습니다. (난민) 그리고 화폐 경제가 발전하여 농민도 돈이 생겨서, 길드를 설립하여 돈을 무기로 영주와 교섭하여 유리한 조건을 끌어낼 수 있게됩니다.
경제의 발전에 따라 농민들은 교회에는 십일조라고 수입의 1/10를 지불하고, 나머지는 2가지로 나눌 수 있다.
첫 번째는 곡물 수확량의 대한 세금이다. 보통 5% 이하가 많았고 15%를 넘는 경우는 거의 없었다고 한다. 두 번째는 방위세가 있다. 사실상 보호비로 보면 된다. 보통 대부분은 돈으로 납부했지만, 성의 수리나 물자 운반 등 노동력이 필요하면 농민이 동원되는 일도 잇었다.
재미있는 점은 이러한 화폐 즉 돈은 각 왕국마다 값어치가 다르기에 해당 마을에 방문할 때마다 거래를 위해 환전소를 가야했다. 오늘날의 화폐도 큰 차이가 없다는게…! 또한 영주의 징수 요구에 무조건적으로 따르지는 않았다고 한다. 오늘날의 기업을 향해 파업을 통해서 교섭하여 원하는 가치를 따낸 것 처럼, 당시에도 돈의 정액화 또는 폐지라는 결과를 얻는 사례도 있었다.
흥미로운 점은 이 당시 농민들의 자문역으로 성직자와 기사, 도시 시민들이 참가했다는 것이다.
p.s : 당시에는 농노(노비랑 비슷)와 자유민을 구분하는 방법이 없었다. 그렇기에 농민들은 자신의 이익에 맞춰서 수시로 신분이 바뀌었다.
참조자료
나무위키 농노제(번역체여서 이해 안되는 부분이 많다 참고), 네이버 블로그
서양문화, 중세 유럽의 생활, 서양 중세 경제사